√ 이다의 「작게 걷기」, 애거서 크리스티 「나일강의 죽음」 책 읽어보기.
결과적으로 나는 누가 뭐라든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에게 정상은 모든 곳에 있다. 모르는 동네에서 약속이 있을 때 시간이 남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일, 제주나 부산이나 전주로 여행을 가면 언젠가 이주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동네 부동산 시세를 흘끗거리는 일, 항공권 가격을 하릴없이 검색하는 일, 숙소를 하염없이 구경하는 일, 서울 시내 고궁에 꽃이 피는 날짜를 알아보는 일, 나아가 '어디' 보다 중요한 '누구'(동행)를 만들어 가는 일. 여행에 관해서라면 나는 이제 외부 조건이나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 목표는 정상에 있는 게 아니라 길 위에 있다. 그리고 바라기는, 부디 가능한 오래 두 발로 여행할 수 있도록 건강하기를.
-17p
'언젠가'를 상상하며 떠돌았는데, 돌이켜보면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
-61p
그 사람이 속한 장소를 바꿔 보기만 해도 많은 편견이 깨진다. 그래서 오래 함께할 사이라면 여행을 권한다. 압박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체력적 한계가 왔을 때 태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67p
도보여행을 제외하면 여행은 필연적으로 인간이 이동하며 오염물질을 생산하는 행위가 된다. 비행기 기차, 자동차를 어디까지 타지 않을 수 있을까. 여행뿐 아니라 우리 삶은 결국 어떤 방향으로 달라질까. 그레타 툰베리의 매서운 기성세대 비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심란해진다. 내게 그 고민은 여행을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느냐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75p
그래서 일상에서 여행을 찾기로 했고, 그 "가난뱅이 근성"의 결과물이 「이다의 작게 걷기」다. 늦은 밤, 피곤한 발걸음,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미쳐 보지 못했던 것을 작게 걸으며 보게 되었다. 당연한 준비물이라 생각했던 이어폰, MP3, 카메라는 집에 두고 갔다. 천천히 걷고, 멈추어 바라보고, 손으로 그리고, 소리로 기억하기 위해서.
(…)
떠나는 것과 다른, 지금 여기 머무는 재미.
-85p
그런데, 삶이 언제부터 애매해지는지 아는 사람? 애매하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순간부터다. 그러니까 오후 3시를 넘기면 생각보다 행동을 먼저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니면 생각할 시간에 잠을 한 시간 더 자든가.
-89p
현대 여행자는 거의 대부분 '남이 본것'을 보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우연히 들어가는 식당이 없고, 발길 닿는대로 가는 관광지가 없고, 충동적으로 사는 물건이 없다. (...) 사건 사고는 줄어들고 획일성은 증가한다.
(…)
내가 본 것을 신뢰하고 명명하는 것. 여행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사람은 어딜 가도 이런 방식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99p
소설은 그래서 여행과 같다. 내가 모르는 삶을 향해 떠나고,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여정이 끝나고 나면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러고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을 때는 책을 다시 펼치거나 그 책을 떠올린다.
(…)
일상을 재발명하는 일. 내가 원하는 공간과 장소를 언제 어디서든 불러올 수 있는 경험을 쌓아 가는 일. 여행은 떠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재해석되고 재생산된다.
-101p
공항은 이상한 장소다.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머무를 수 있는 장소이다. 공항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시간대, 다른 날씨, 다른 공간에 떨어지는데 그런 이상한 변화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처럼 만들어준다는 면에서 공항은 특별한 장소다.
-정은, 「커피와 담배」
샤흐트가 한국에 온 대목에서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한국에는 살인이나 강도도 드물고 테러나 마약은 거의 없다는 확신에 찬 문장에서. 복한에서 쏘아 올리는 미시일 말고는 두려워할 게 없다고 말하는 샤흐트는 모른다. 한국인은 북한에서 뭘 쏘아 올리든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북한의 도발이 뉴스에 오르든 말든 주가는 꼼짝하지 않고 마트에서 사재기를 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샤흐트가 스무 살 안팎의 여자였다면 호의에 기댔다 무슨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다.
(…)
누구도 같은 나라를 여행하지 않는다. 피부색과 성별, 나이, 건강 상태 등에 따라 다른 대우를 경험한다. 샤흐트가 경험한 한국은 정말 멋진 나라였다. 책을 읽으며 나도 샤흐트의 한국을 여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131p
가장 어려운 수행은 일상을 새로운 마음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이다. 이상적인 장소에서는 불가능이란 없어 보이지만, 현실은 어떤가. 그렇다고 떠남이 무용하다는 말은 아니다. 혼자 나 자신과 지내 본다. 회의하고 절망했던 외부의 모든 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내 안에서 고칠 수 있는 것을 들려다본다. 언제나 제자리인 것 같은데, 열심히 발걸음을 놀리면 어느새 멀리 와 있다. 그걸 잊지 말고 오늘도 걸으면 된다.
-139p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 말을 빌려 본다. "실패가 뭔지 아냐? 시도했다는 증거야." 빅막례 할머니 채널을 운영하는 김유라 PD도 인스타그램에 "'밑져야 경험'이 되어야 시작이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썼다.
-143p
상상하고 멈추는 대신 직접 부딪혀야 보이는 세계가 있다. 아무리 현실 이상을 상상해도 (직간접) 경험의 테두리 안이기 마련이다. 경험 밖에서 새롭게 경험하기. 아는 세계에 머물 거라면 뭐 하러 떠났겠는가. 이건 여행 뿐 아니라 이직이나 연애나 투자에서도 모두 마찬가지. 우리는 때로 자신을 걸고 크게 얻거나 크게 잃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잃는 순간에도 무언가를 얻는다는 사실을.
-167p
여행이야말로 쓸모없음의 쓸모를 추구할 때 가장 값진 것이다. 왜 여행을 떠나느냐, 차라리 그 돈을 저금하라는 말을 지주 들었다. 모든 일에 쓸모를 따지고, 나의 쓸모를 극대화하기를 사회에서 늘 요구받는다. 모든 일이 좋을 때는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여행 없이 살 수 없었다. 우열이 아닌 다름으로 삶을 가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열을 재는 시선에서 놓여나는 것뿐이다.
-179p
여행지에서는 쉽게 너그러워지곤 한다.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 평상시에는 나도 모르게 이를 약물고 있는데.
이상적인 나에 더 가까워지는 방법이 여행하다. 시간을 넉넉하게 쓰고,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채우고, 많이 걷는다. 숲 근처로, 강이나 바다 근처로 걷는다. 그게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일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여행, 그게 다예요.
-189p
여행 미지막 날 아침에 눈뜨면서 늘 하는 생각이 있다. 벌써 마지막 날이네. 왜 여행에는 끝이 있을까. 끝이 없으면 여행은 방황이 되고 일상이 됐다. 그러면 이름다움을 잃겠지, 여행도.
-201p
하지만 언제나 목적지를 알아야 한다. 검색창에 무엇을 써 넣을지 알지 못하면 기술도 소용이 없다. 여행에서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하면 돈도 시간도 그저 낭비될 뿐이다. 이는 장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행은 장소만큼이나 내가 원하는 경험에 대한 설계가 중요하다. 나를 알아야 제대로 여행한다.
-2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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