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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사회

민낯들 - 오찬호

by Seuni's Book Journey 2024. 3. 20.

 

 

 

 

 





목차

프롤로그 - 여기를 보자는데 저기를 보는 사람들


1부, 말줄임표 - 죽음도 별 수 없다
첫 번째 민낯, 살고 싶다는데도 별수 없다
- 성 소수자는 여기에 있다 故 변희수
두 번째 민낯, 심장이 찢어져도 별수 없다
- 말이 칼이 될 때, 故 최진리
세 번째 민낯, 맞아도 별수 없다
- 때려 주는 선생이 진짜라는 이들에게, 故 최숙현
네 번째 민낯, 떨어져도, 끼여도, 깔려도 별수 없다
- 너는 나다, 故 김용균
다섯 번째 민낯, 일가족이 죽어도 별수 없다
- 가난이 죄책감이 되지 않기를, 故 성북 네 모녀
여섯 번째 민낯, 국가를 믿어도 별수 없다
- 내 몸이 증거다, 故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 oooo명

2부, 도돌이표 - 우리는 망각에 익숙하다
일곱 번째 민낯, 우리는 더 날카로워질 것이다
-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덟 번째 민낯, 우리는 또 둔감해질 것이다
- 관대한 판결을 먹고 자랐다, n번방 사건
아홉 번째 민낯, 우리는 계속 수군댈 것이다
- 나는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 낙태죄 폐지
열 번째 민낯, 우리는 끝없이 먹먹할 것이다
- 기억과 책임 그리고 약속, 세월호 참사
열한 번째 민낯, 우리는 언제나 잊는다
-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열두 번째 민낯, 우리는 역시나 순진하게 믿는다
- 공정하다는 착각, 조국 사태

에필로그 - 지금 여기는, 우리의 결과다

 


💬

나 혼자일 때는 몰랐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자라니 이런 불평등한 세상 속에 아이를 내보내기가 무섭다. 알면 알수록 더 무섭다.

하지만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모른 체해서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하나는 힘이 없지만, 하나가 모여서 이뤄낸 영향력을 우린 이미 안다.

'굳이'가 아닌 '나부터'가 되보고자 한다.

별다를 게 아닌, 관심갖기, 잊지 않고 기억하기, 왜곡이 아닌 진실에 기울이기. 여기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

사회문제를 다룬 책들을 보면 불신이 커진다. 국가에 대한, 기업에 대한, 사람에 대한 불신들이.

모르는 게 약이라는 옛말처럼 정말 모르는 척 하면 될까?

나 하나만 잘 살면 되는 걸까?

과연 그것이 내가 잘 사는 길일까?

 

💬 이 책을 읽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책의 주제들이 다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사건이 발생해서 안타깝지만, 내가 아니니'가 아닌, 이 사건들 통해 재발하지 않도록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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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봐야 하는데, 저기를 보자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다양한 문장으로 변형된다. 그것만 중요해? 왜 나쁜 것만 말해? 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 희망이란 단어도 교묘하게 악용된다. 희망은, 절망을 걷어 내야 비로소 가능한데 덮어두고 무작정 앞으로만 나가잔다. 아픔을 노골적으로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다.
절망을 수건으로만 덮어 두었으니 바람만 불면 다시 절망이 꿈틀거린다. 절망도 잦아지면, 보는 사람의 감각이 무뎌진다. 안타까운데, 딱 거기까지다. 사회가 원망스러운데, 딱 거기까지다. 그 안타까움과 원망스러움을 의미 있는 사회적 논의로 확장시키고자 조금만 힘을 보내 달라고 하면 낯설어한다. 낯설다고 눈감았기에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불편함은 무한 반복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거칠어진다. 처음엔 그래도 조금이나마 미안함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뱉지는 않았던 사람들이 당당해진다. 귀찮다고 말한다. 너만 힘드냐고, 유난 떨지 말라면서 빈정거린다. 자기 업보라면서 조롱한다.
(...)
다짜고짜 차별이 왜 문제냐고 묻는 것도 다양성의 좋은 예시일까? 혐오할 자유도 있는 거 아니냐는 주장을 다양성이란 말로 감쌀 수 있을까?
- 프롤로그

 

 


 

 

세상의 변화를 자신에게 익숙한 해석의 틀로만 재단하면, 차별받는 사람은 늘 차별받는다. '성'을 기계처럼 탁탁 분류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깰 때 세상은 더 평등해진다.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된다? 착각이다. 남성은 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은 남성을 사랑한다? 편협한 생각이다. 사람은 모두 성욕을 지녔다? 성급한 일반화다. 이런 고정관념이 모이고 모여 그동안 인류는 성 소수자들을 차별했다. 하지만 성 중립 화장실이 등장했듯, 조금씩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 그 세상에 한국도 포함되어 있는지가 의문이지만.

남자로 태어난 변희수는 자신을 남자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게 왜 안 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누구의 자연스러움이 누구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남자로 직업군인이 되어 남자 동료들과 지내는 게 변 하사에게는 큰맘 먹고 이겨 내야 하는 과정이었다.

트랜스젠더는 인류 공동체 안에 늘 존재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연스레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이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상을 살아가고자 한다. 숙제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그저 과거처럼 정상과 비정상으로 사람을 구분지으며 차별과 혐오를 당연시한다면, 그들은 다시 숨게 된다.

세상에 별사람이 다 있다는 시선으로 빌 일이 아니다. 이들은 늘 존재해 왔다. 다만 종교와 전통을 들먹이며 평범한 사람에게 죄니 질환이니 딱지를 붙이고 싶어 하는 뿌리 깊은 차별과 혐오의 벽 속에 짓눌려 있었을 뿐이다. 보편적 인권은 보편이라는 울타리 안에 소수가 계속 포함되면서 확장해 나갈 때 완성된다. 그리고 지금 상태로 충분히 않다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심이 있어야 그 크기가 커질 수 있다.

성 소수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는 게 힘든' 기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닐 거다. '그렇게 태어난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가 문제임이 분명하다. 변희수 하사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안타까운데, 그래도 트랜스젠더는 어쩌고저쩌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안타까운 사연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성 소수자는 여기에 있다 故 변희수

 

 

누군가는 화장실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쳐 못해봤다.

나는 어떤가? 나는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바라볼까?

나의 시선은 차별을 달고 있진 않은지.

 

 


 

 

외부 세계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엘리트는 많은 것을 결정하고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인데, 그 엘리트의 세상 보는 눈이 편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의사는 사례일 뿐이고, 핵심은 '같은 생각을 오랫동안 지닌 집단'이 견고해질 때의 위험성이다. 이들이 휘두르는 창은, 공정한 창이 아니다. 게다가 본인들은 매우 공정하다고 여기기에 누가 창에 찔린 들 관심이 없다. 이게 엘리트만 해당하는가. 통하는 게 많아 끼리끼리 결집하며, 독선으로 무장한 집단은 무수하다.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건 양질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다양한 의견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 주는 유명한 구절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받는다면 나는 함께 싸울 것"에서 알 수 있듯, 좋은 사회는 '여러' 의견이 일단 많아야 가능하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1859)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회에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토론을 거쳐 여러 의견을 숙성해 완성시키는 기회가 풍부한 사회일수록 구성원들 사이의 합의는 생동감을 얻게 된다.

내 경험은 온라인 공간에 무수히 떠도는 상스러운 욕설 덩어리 하나를 만진 것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경험에 일상 전체가 위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주변에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 100명의 선한 사람보다 1명의 악한 사람이 신경 쓰인다. 가끔은 저 100명도 내 앞에서 웃는 척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익명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지속되면, 모든 관계를 의심하게 되니 개인은 점점 고립된다. 그 끝에 나쁜 선택지가 있음은 자명하다.

실제 악플에 대처하는 의연한 자세라면서 소개되는 건 '그들은 변하지 않으니 상대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많다. 틀렸다. 그들은 '더 나쁘게' 변했다.
- 말이 칼이 될 때, 故 최진리

 

 

유독 남에게 신경을 쓰는 편이다.

누군가 말투가 살짝 뾰족해도,

나한테 대하는 태도가 살짝만 달라져도,

연락이 없어도,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실수했나를 더듬어보며 생각한다.

하물며 연예인들의 악플은 어떨까.

한 사람의 시선에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말들은 나에게 얼마나 큰 공포로 다가올지

겪어보지 않아도 무서움은 내가 하는 상상 이상일 테다.

 

 


 

 

선수 끼워팔기는 오랫동안 관행이었다. 그냥 사람만 끼워졌겠는가. 돈이 오가는 입시 비리였다. 잘하는 선수의 부모가 대학으로부터 돈을 받았고, 못하는 선수의 부모는 감독에게 돈을 주며 어찌어찌 엮어 달라고 읍소했다. 이때 맺어진 동맹 의식은 누군가에게 평생 족쇄가 된다. 1990년대 말부터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공식적으론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관행의 유산들이 종종 등장한다.

운동선수에게 운동을 그만둔다는 건, 백지상태가 되어 망망대해에서 허우적거려야 함을 뜻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이도 저도 아닌 현재를 버티게 한다. 폭력에 입을 다물게 한다. 운동을 그만뒀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좁은 바닥에서 내부 고발자라고 나쁜 소문이라도 나면 코치 자리 하나 얻지 못한다.

조직이 폐쇄적이면 문제를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 내부적으로 쉬쉬한다. "누가 가해자야!"라는 반응보다 "누가 신고했어?"라는 추궁이 일상적이다. 피해자가 동료 인생을 망치는 나쁜 인간으로 둔갑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이걸 몸으로 느낀 최 선수는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 줘."라는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20년 6월 26일이었다. 2020년이다. 1920년이 아니다.

폐쇄적인 체육계의 엉터리 시스템은 국민들과 무관하지 않다. 스포츠의 결과, 오직 결과만 보고 환호를 보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성적 지상주의'는 선수와 코치가 집착한 탓도 있지만, 국제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우리' 때문에 생겨났다. 지나친 민족주의의 시선으로 스포츠에 몰입한 언론과 그런 기사에 일희일비한 사람들이 '운동은 시작한 이상 목숨을 걸어야 하는' 풍토를 조성했다. '올림픽 금메달이 국위선양'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고선 체육계 폭력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종합 순위 10위 안에 못 들면 어쩌다가 이런 지경이 되었냐는 뉴스가 등장하지만 올림 순위와 국격이 전혀 상관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민 자체가 없다.

스포츠계의 괴기스러운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 대회 성적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흥분하는 사회가 원인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 과잉된 감정에서 엉터리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연장되었으며,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최숙현 선수는 전전긍긍하며 끝내 기댈 곳을 찾지 못했다.

과거에 젖어 있는 지도자들은 많다. 요즘 선수들은 정신력이 부족하다, 참을성이 없다, 호화롭게 훈련한다, 훈육 좀 했다고 짜증 낸다 등등의 이야기 속에는 여전히 '사랑의 매' 운운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된 시절을 추억처럼 여기는 관성이 깊숙이 배어 있다.
- 때려 주는 선생이 진짜라는 이들에게, 故 최숙현



요즘을 보면 딱히 운동권만이 아닌 것 같다.

현재 의료계 파업을 봐도, 단체로 결집해서 움직이고,

생각이 다르지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자신의 소신이 아닌 집단행동에 함께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물며 예전부터 유명한 운동부는 말해 무엇할까 싶다.

 

 


 

 

업무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것을 아웃소싱이라고도 하는데, 영어라서 세련되어 보인들 그게 하청이다. 아래에 청한다는 뜻이지만 무엇을 청할 때의 공손함 따위가 배어있진 않다. 협력업체, 파견 근무자 등 상황에 따라 하자를 피해 표현하지만, 실제 현장의 상하 관계는 매우 엄격하다. 위에서 어떤 일을 언제까지 끝내라는 작업 지침을 하달하면 아래에서는 '알아서' 해야 한다. 비용이 부족하면 인력을 줄이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든 '어떻게든' 해야 한다. 당연히 안전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청업체가 위험을 감수하고 일을 해야 하는 구조, 말 그대로 '위험의 외주화'다. "숨진 노동자는 하청업체 직원이었습니다."라는 뉴스가 낯설지 않게 들리는 이유다.

광주의 건물도 그 방법으로 철거되다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무너졌을 뿐이다. 예측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정교하게 현장을 살펴볼 전문가를 고용할 여력이 없다. 임금이 낮고 현장은 위험하니, 숙련된 노동자들이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전 불감증이라고들 하는데, '불감'하다고 느낄 사람도 없고 느낀들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만 그나마 현장이 굴러간다. 사고는 인재지만, 그 인재가 사회와 무관한 경우는 없다.

노동을 하다가도 위험 앞에서 멈칫거릴 자율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없다.

안전 수칙을 지키며 일하면 '저성과자'가 되는 구조에서는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일하다가 '정기적으로' 사람이 죽는다. 하지만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서 재발 방지가 요원하다. 사측에서는 '개인의 업무 미숙'을 사망 원인으로 발표한다. 결국 나쁜 구조는 그대로, 아니 더 악화된다.

이윤은 나에게 불이익은 너에게,
안전은 나에게 죽음은 너에게,
건강은 나에게 골병은 너에게.
죽음, 위험, 골병은 따로 모아서 남에게.
이것은 생산력 강화가 아니고
경영합리화가 아니고
일자리창출이 아니다.
이것은 약육강식이다.



"성과급을 줄이고 하청업체 몫을 늘리는 데 찬성하시나요?"라는 질문에는, 노동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 쉽게 예측된다. 위험의 외주화는, 누군가에게는 위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이득이다. 이처럼 산업구조의 변화는 함께 을이었던 노동자들을 병, 정, 무로 더 세분화시키며 연대를 무용하게 만들었다.
- 너는 나다, 故 김용균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왜,

오히려 돈을 더 적게 벌까?

왜 당당할 수 없을까?

 

 


 

 

재벌 집안의 손자 손녀들이 돈 안 내고 밥 먹는 게 말이 되냐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래서' 무상급식이 필요했던 거다. 최소한 학생들의 세계에서는 '너는 부자가 내 준 돈으로 공짜로 밥 먹는다'는 낙인과 멸시가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집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내 덕에 네가 밥 먹는다'면서 우월 의식에 찌드는 게 구조적으로 어려워졌다. 반대로 도움을 받는다는 부채의식에 지나치게 겸손해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려고 그물망을 촘촘히 하는 노력은, 어떻게 해도 다시 사각지대를 만들어 낸다. 소득 100만 원 이하를 지원한다는 게 소득 110만 원이 괜찮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성북 네 모녀와 송파 세 모녀가 주목받는 것은 모두가 성인이었기 때문이고, 미성년자 자녀와 부모가 함께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흔하기에, 이런 안타까운 죽음을 그저 별수 없는 세상의 한 조각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구조가 이런 흔함을 상식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슨 이유로 벼랑 끝에 몰리게 됐든, 죽지 않았다면 계속 살도록 사람을 돕는 게 사회의 존재 이유다.

앞서 무상급식을 다루면서 이야기했듯이 보편적 복지는 10년 전부터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어 천천히 영역을 넓혀 가고 있지만 갈길이 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보편적 복지의 필요성'을 현재의 선별적 복지 시스템을 완전히 갈아엎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지나치게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빈곤층에 대한 집중적 관심과 지원이 한순간에 사라진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편적 복지 논의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메울 방법을 다각도록 고민하자는 것이지, 기존의 모든 영역을 보편적 복지 형태로 바꾸자는 게 아니다.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최저임금을 현실적으로 인상하고 사업주가 이를 잘 준수할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너지는' 사람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기본소득은 생계 하한선 아래로 한 명씩 추락할 때마다 떨어진 사유가 타당한지 따져 가며 도와주자는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한 명이라도 추락하는 걸 막자는 데 의의가 있다.

선별적 복지 시스템에서는 이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누가 더 위험해졌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소득이 50% 감소한 이들을 도우면, 당연히 "그럼 49% 감소된 이들은 괜찮다는 건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모든 신호가, 기존 복지 제도에는 한계가 있음을 계속 표하고 있다. 추락하여 다리 부러진 사람을 도와주는 게 아닌, 누구라도 '추락하지 않을' 고민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
- 가난이 죄책감이 되지 않기를, 故 성북 네 모녀



이들은 세상을 등지는 상황에서도

마지막 집세 70만 원과 공과금을 봉투에 담아

집주인에게 메모를 남겼다는 부분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삶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시민으로,

이웃으로의 도리와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

돈이 많아도 탈세를 하고, 사기를 치는 등등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왜 이들은 이렇게 착한 걸까. 가슴이 먹먹하다.

그 돈을 모으고자 죽기 전까지 얼마나 아등바등 했을지 생각하면.

하늘나라에서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도시락이 무상급식으로 바뀐 부분이

불평등의 해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난 도시락 세대를 지났고,

내가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야 하는 상황에서

급식이 편리해졌다 생각했을 뿐.
사회적으로 변하는 부분에 대해서 "바뀌었네?!"가 아닌

"왜 바뀌었지?"라는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알아봐야겠다.

 

 

 

 

 

 

 

 

 

 


 

 

한국에서 '규제'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덫인 양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기업인은 대통령을 만나, 상품을 승인받기까지 제출해야 할 서류도 많고 기준도 까다로워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면 언론은 이 고민을 빨리 해결하는 일이 옳은 것처럼 포장하고, 공무원의 원칙적 행동을 늦장 태도라고 비판한다. 그사이 수십억 원이 증발한다고 겁을 준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쓸데없는 기준을 가려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규제를 무작정 '낭비'라고 보는 게 과연 공동체에 이득이 될까?

가장 전문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된다고 믿었던 국가에 실망을 하니,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는 비상식적인 결정들이 많아진다.

투박한 맹세문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는 표현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고 2007년에 수정됐다. 문장 하나의 변화지만 의미는 크다. 수정된 버전은 나라가 자유와 정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국민은 충성이 아니라 '비판'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강요하지 말고,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자유와 정의라는 철학을 정책에 잘 반영해서 신뢰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와 누구도 '존엄한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정의'가 상호 보완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시장경제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운영될 때 가능하다. 장사는 누구나 해도 되지만, 장사를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아니다. 근로시간, 최저임금 등 지켜야 할 것이 많다. 당연히 아무거나 팔 수 없다. 그 자유가 누군가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면 국가는 시장의 자유를 규제한다. 그게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인들, 기업의 명운이 걸린 것인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
- 내 몸이 증거다, 故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 oooo명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마주하면 소름이 끼친다.

가습기에 생긴 세균을 없애 준다고 하여,

국가를 믿고 사용했던 제품이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사건이 그냥 넘어가면 안되는 이유다.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으니까.



 


일상이 무너지면 공감 능력도 사라진다. 내가 힘드니, 나를 힘들게 한 이를 원망한다. 사람들은 확진자를 자신의 일상을 어그러뜨린 이로 여긴다. 자신의 일상을 방해한 이를 찾아 비난과 인신공격의 칼을 휘둘러도 된다고 착각한다. 팬데믹을 선언한 지 넉 달 가까이 지난 시점에 여론조사 기관 갤럽인터내셔널이 조사한 국가별 코로나19 인식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감염이 두렵다'는 응답자가 71%인데, '확진됐을 때 받을 비난과 피해가 두렵다'는 응답도 66%에 이르렀다. '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냐'는 주변의 질타에 대한 걱정이 코로나로 몸이 아플 거에 대한 두려움 못지않게 높은 수준이다. 칭찬이 자자했던 K-방역의 이면, 혹은 민낯이다.

방역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밀접 접촉자를 빨리 찾아내고 격리하고 관련 공간을 (가급적 타인들 모르게) 소독하는 것이지, 이게 누구의 삶이 다른 누구에게 해석될 여지를 줘도 됨을 뜻하진 않는다.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무슨 문제냐고 하겠지만 주변 사람이라면 금방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의 세밀한 내용들이었다.

코로나 특수를 누린다는 업종을 떠올려 보자. 사회적 거리두기의 기간과 강도와 비례하여 유통업계는 호황이었다. 집집마다 문 앞에는 배달 상자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유통의 최종 단계를 책임지는 택배 노동자들은 과로로 죽는다. 대한민국이 무슨 대단한 것처럼 우려먹었던 '언택트'라는 세상은 누군가의 과로를 연료로 작동되고 있을 뿐이다.

외환 위기 이후, 각자도생의 법칙이 만병통치약이 된 이유는 사회가 '살아남은 자'에게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바늘구멍이 좁아지면 구멍을 넓히는 게 지당하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구멍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무성했다.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화에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면서 마치 모두가 생존 비법대로 행동하면 살아남을 것처럼 떠들었다. '살아남는 법'만 부유하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래서 공동체의 토대가 푸석해져도 이를 공론화하지 못한다. 지금은 다른가?
-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 책을 읽고 자서 그런지 밤에 꿈을 꿨다.

좀비 같은 또다른 위기의 시대였던 것 같다.

도망치다가 깼다.

갑자기 코로나19가 생각났다.

나는 운이 좋게도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업이었어서 큰 타격은 없었다.

갑자기 내 주변 사람들은 코로나19 시대를 견뎠는지 생각을 해봤다.

나는 타격이 없었어서 너무 무심했다.

뉴스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힘들다, 위기다는 얘기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나는 다행이다라는 생각만으로.
하지만 과연 다음에도 난 다행일까?

라는 생각이 꿈에서 깨어나서 너무 무섭게 다가왔다.

또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를 생각하니

세상이, 삶이 너무 두렵게 느껴진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철저한 디지털 보안을 보장했고, 그러니 감시가 느슨해지면서 범죄의 수위는 높아졌다. 이걸 사회적이라 하지 않으면 뭐라 하겠는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뛴 적이 없다는 말이다. 범죄자들은 날 필요도 없었고 뛰지도 않았다. 비웃듯이 걸으면서 원래 하던 자신만의 비즈니스를 체계적으로 키워 나갔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몸에 칼이 들어와 피가 철철 넘쳐흐르지 않아도, 성착취물 유포 피해자는 거의 '죽음'과 다름없는 고통을 느낀다. 가해자가 무기징역을 살더라도 피해자의 '영상'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말 그대로 '영원한 고통'이기에 과거의 시각과 기준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한국은 과거의 법전만 살펴보는 과도기가 너무 길었다.

영국 BBC의 한국 특파원은 "한국에서는 아동 포르노 제작자를 달걀 절도범 수준으로 취급한다."라며 비판했다. 당시 한국에서 달걀 18개를 훔친 사람에게 검찰이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빗대어 한국의 물렁물렁한 법 적용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는 표현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다. 허술한 판결이 '악랄한 세계'의 판을 키운 셈이다.

언론에서는 "초유의", "전례 없이" 등의 표현으로 묘사하면서 n번방 사건을 우주에서 온 악인들의 소행처럼 다루었지만, 우리는 독버섯이 땅에서 자랐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보통의 세계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악마가 아니라 출석부에 흔히 등장하는 평범한 아무개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지금껏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한쪽을 변태라 취급하면, 역설적으로 다른 한쪽의 문제에는 둔감해진다. n번방을 만들고 운영한 이들은 물론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까지, 모두가 한국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특별한 DNA 구조를 지니지 않았다.

n번방의 괴물들은,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았다.

성의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무례한 차별을 깨뜨리기 위함이다. 성적 자유는 어디서나 성적으로 즐긴다는 뜻이 아니라, 직장에서 음담패설을 듣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내가 싫으면 성관계를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개방적인 성 관념은 어릴 때부터 섹스를 즐긴다는 게 아니라, '성을 무기로' 사람을 구속하지 않고 함부로 판단하고 조롱하지 않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이 낯설었던 한국에서 성적 자유느 오용되었다. n번방은, 성을 자유롭게 말하는 시대가 얼마나 엉성하고 엉망으로 흘러갔는지를 대변한다.
- 관대한 판결을 먹고 자랐다, n번방 사건

 

 

둘째 아이가 얼마 전 오픈채팅방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이름, 나이, 학교. 자신의 개인정보를 공개했다.

내 아이보다 더 어린 아이는 자신의 사진까지 공개를 했다.

어린 나이라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이른 나이가 아니었다.

n번방 사건 같은 온라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돌려서 설명을 하면서도 너무 무서운 이야기이다.

n번방 사건이 우리 아이의 사건이 아닐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n번방이 아닌 어떤 더 한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간통죄 폐지에 찬성하는 건 불륜은 합법이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간통을 합법과 불법의 잣대로 나눌 수 있는지 따지자는 것이다. 애초에 문제 설정부터 잘못됐다고 묻는 것인데, 끝까지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간통의 법적 잣대를 없애야 한다는 걸, '모두가 간통을 즐기는 아름다운 세상'을 원하는 것처럼 해석한다. 무엇이 공적 영역에서 죄로 규정되지 않는 게 사적 영역에서까지 거리낌 없이 그래도 된다는 면죄부가 주어지는 게 아님에도, 둘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치시킨다. 간통'죄' 폐지에 찬성하는 것과 간통에 찬성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같은 이야기로 듣고 말한다. 간통죄 폐지를 간통의 찬성과 불륜의 자유로 이해하기 전에, 간통이 유독 한쪽 성별에게 더 굴레이자 낙인의 이유였다는 걸 짚어야 하는데 많은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차별과 혐오 항목을 해당 사항 없음으로 비워 버린다. 그러니 성적 자기결정권은 '방탕'으로 연결되어 '문란함'을 상징하게 된다.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건 태아도 생명이라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니다. 여성이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건 "자유롭게 섹스하다 임신해도 지우면 그만이지."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늘 그것과 별반 다름없는 이야기가, '낙태죄를 폐지하면 안 되는 이유'가 전개될 때마다 불쑥불쑥 등장한다. 처음에는 출산 없이 사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다는 거창한 내용의 일장 연설이 이어지다가 곧 생명의 소중함과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등장한다. 그러다가 생명 경시 풍조로 순식간에 논조가 전환되면서 '나쁜 사람들'이 언급된다. 결국엔, 여성이 헤퍼진다는 말이 불쑥 끼어든다. 낙태죄 논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인 '남자는 왜 책임지지 않는가?'는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음을 실토하는 셈이다.

임신과 출산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할 사람의 문제다. 자신의 신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즉 임신 유지와 임신 중지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한 인간의 생애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엔 경제적 요인은 물론 개인의 사회적 위치, 미래에 대한 계획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복합적이니 더더욱 단순하게 생각하기 어렵다.

임신·출산·육아는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한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다.

- 2017헌바127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 결정 요지 일부


'낙태죄 폐지'는 '낙태할 자유'와 같은 의미지만, 다른 결이 있다. 낙태죄라는 사슬을 푼 것은 자유를 향한 갈망이기 전에, 자유가 '없었을 때' 여성이 어떤 고충에 허우적거렸는지를 간과하지 말자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여성의 몸에 국가가 기준을 들이대며 왈가왈부하는 정도를 조금이나마 줄였다고 해야 적당할 것 같다
- 나는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 낙태죄 폐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를 무조건 낳아야 한다는 건,

그 아이의 책임을 누가 진다는 것인가?

모든 엄마가 자기 자식을 다 예뻐하는 건 아니다.

하물며 상황이 나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현재 발생하는 사회문제만 봐도 대충 답이 나온다.

낙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마음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폭식투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여러모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들을 악마, 패륜 등으로 묘사한 글들이 쏟아졌다. 저들을 대한민국과 어울리지 않는 일부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과연 그럴까? 내가 느낀 먹먹함은 단지 그들의 기행을 목격한 불편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추모한다는 것의 한계와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의 미흡함을 다시 마주했기에 느껴지는 몸서리였다. 그들 위로 '우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추모의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설익은 모습들 말이다. '지하철 투신으로 출근길 혼란'이라는 표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들 말이다. 학교에서 친구 누가 자살을 한들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던 우리들 말이다. 죽은 사람 이야기가 몇 번 반복되면 '산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냐'면서 추모를 지겨움의 프레임에 가두는 '구조적인' 감정 상태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폭식투쟁은 그 토양 위에서 자란 괴상한 나무였을 뿐이다.

곳곳에서 유가족을 '나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기억하려는 사람에겐 잊으라고 했다. 잊지 않으려는 사람에겐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죽은 자를 기억하지 않는 게 어찌 사람이냐고 따지는 이들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라는 핀잔을 들었다.

안개 때문에 더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음에도 출항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선장은 "회사가 시키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선장이지만 거기서 밥벌이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했다. 확실하지 않아도 혹시 모르니 문제부터 제기하는 건 한국 땅에서 이다지도 낯선 일이다. 애매하면 그냥 평소처럼 하는 게 모두에게 이롭다는 안일한 태도는 참사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허공에 날려 버렸다.

그날 이후는 이전과 반드시 달라야 한다. 그 시작은 고통에 공감하는 일이다. 사실 공감이라는 뜻 그대로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세월호 침몰 장면을 TV로 보면서 느낀 먹먹함은 그들의 슬픔과 같을 수 없다. 내가 단식투쟁장 옆에서 폭식투쟁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먹먹함은 그들의 회의감과 같을 수 없다. 나의 무기력감이 그들의 것과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이 간격을 줄여 나가려는 노력은 내가 해야 한다. 그들이 내 눈높이로 세상을 살지 않음을 비난해서는 안 되며, 내가 그들 눈높이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더 나은' 공감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 세월호를 붙들어야 한다. 그들이 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추모는 감정이 아니라 학습이다. 개인이 알아서 느끼는 게 아니라 사회의 옳은 방향을 위해 지녀야 할 시민 정신이다.

우리의 추모에는 이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경고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먹먹하게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볼 것이고, 또 그 죽음을 조롱하는 이들을 보며 역시나 먹먹해질 것이다. 지나간 일을 왜 그렇게 붙들고 있냐는 그 생각, 추모가 밥 먹여 주냐는 그 생각,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그 생각이야말로 엉터리 시스템이 가장 원하는 결과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참사 직후부터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며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건, 2014년 4월 16일 그날만을 떠올리자는 게 아니다. 그날 이후에 이 사회가 어떤 책임을 다하는지를 따져 보고, 뱉었던 약속들을 다시 기억하자는 거다. 언제까지? 영원히
"슬픔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슬픔을 잊기 위해 그 시간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며. 그 말들이 비수가 되어 다시 하나의 시간을 슬픔에 가둔다."
- 기억과 책임 그리고 약속,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가족 팔아 돈 번다는 이유로 욕하면서, 세월호 사건의 책임에 대해서는 모른 척한다.
그건 그거고 저건 저거다.

유가족들은 나쁜 사람이라는 프레임은 막말로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왜 세월호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결과는 어찌됐는지,

앞으로의 재발 방지를 위해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것이 왜 중요하지 않을까?

그건 당장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나의 일이다.
서울 한복판을 걸어가다가 사람들에게 깔려 죽는 이 사회에서,

적어도 나와 가족, 내 주변을 위해서라도 관심을 갖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책에서 한 피해자가,

세월호 참사 때 그냥 보고 흘렸는데

자신이 이태원 참사를 겪고 보니,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 때 무심했던 걸 후회한다고 했다.

정말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에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을'(헌법 제84조)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후에 법의 심판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중 쫓겨날 만큼의 죄를 지었냐고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심이 분노로 폭발한 이유가 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부정부패를 '어휴, 한심해!'쯤으로 이해하지 않고 '헉! 다시 반복되는구나!'라고 여겼기에 촛불을 들었을 거다. 그저 다음 선거 때 심판하자는 수준으로 두고 볼 수 없다는 두려움, 국민을 기만했던 끔찍한 국가폭력의 역사가 또 등장할 수 있다는 걱정스러움이 그만큼 강했다는 말이다.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고 얼추 민주주의의 내실을 다시는 데도 커다란 희생이 있었다. 그런데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가 현직 대통령의 말과 행동에서 부단히 존재감을, 그것도 긍정적으로 드러냈기에 사람들은 더욱 분노했다. 역사 인식이 부재한 사람의 부정부패, 이 두 가지가 겹쳐지니 국민들의 분노는 배가 된 것이다.

한번 잘못 흘러간 역사는 다시 물줄기의 방향을 제대로 돌리기까지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하다. 박근혜는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 균형을 기계적으로 강요했다. 역대 정부에 과가 있지만 공도 있었다는 논리만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민주화의 정당성만큼, 민주주의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정까지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면서 논란의 불씨를 계속 지폈다. 문제가 불거지면 매번 이렇게 말했다. "과거로 가려면 한이 없다. 이제 미래로 가자." 미래로 가는 건 좋다. 하지만 과거를 덮고 가는 미래는 후속 세대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미래가 아니다. 박근혜 탄핵 사건은 끔찍했던 역사를 다시는 망각하지 말자는, 언제까지나 기억하자는 투쟁이었다.
-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교과서 사건, 최순실 사건 등 다양하게 기억은 하지만,

탄핵의 이유가 세월호 참사로만 기억을 했다.

나 역시도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교하기도 했었는데

다른 이유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부단하게 '공정한 불평등'은 사회를 더 이롭게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들의 눈에 입시 비리 뉴스에 나오는 내용들은 3루 주자가 반칙을 해서 홈으로 들어온 '나쁜 불평등'이지만, '법만 어기지 않았다면' 능력에 따라 결과를 얻고 보상을 차등적으로 받는 것은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동기부여가 되기에 '좋은'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동기부여하는 시스템이 이미 불평등한데, 좋은 불평등이니 나쁜 불평등이니 하는 구분이 그렇게나 쉬울까 모르겠다. 물론 개천에서 살다가 용이 된 사례를 내밀어 '아직 세상은 정직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모든 통계는 개천이 그 자체로 불리함을 증명한다. 3루까지 남들보다 안정적으로 간 사람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 3루부터의 여정이 쉬웠다는 것도 아니다. 노력 끝에 홈으로 들어온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3루에서 시작했기에 더 '유리했다는' 사실을 감출 순 없다. 3루까지 가다가 아웃당한 아무개와 출전도 못해 유니폼이 깨끗한 누구를 보고 '노력 부족'이라고 비난할 이유가 될 수 없다.

피라미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 한 단계 상승할 때마다 삶이 달라지리라는 기대를 신분이나 지위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남녀노소 꿈꾸게 한 체제는 인류 역사상 자본주의가 처음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건방진 포부는 그동안 금기였지만, 자본주의는 '희망'을 개인에게 선사했다. '상상'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겠다는 각오로 버틴다.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란 기대로 고통을 참는다. 그 결과 불평등을 전제한 자본주의는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진 개인들 덕분에 맹렬히 전진했다.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껐다. 우리의 '정의' 관념은 이런 적자생존의 법칙 위에서 빚어졌다. 사람들은 '정의'를 모두가 동등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측면이 아니라, 노력의 크기에 따라 각자 도달하는 지점이 불가피하게 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과가 불평등해도 노력한 만큼이니 공정하다 여겼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형태를 갖춘 근대 공교육은 '공정한 불평등' 논리를 부단히 가르쳤다.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학교를 다니니 기회는 평등해졌다고 포장했다. 그러니 시험 결과에 승복하라고 주술을 건다. "결과로 증명하라!"라는 말이 부유하는 세상에선, 결과를 의심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사회가 위와 아래로 선명하게 구별되는 현상 앞에서, '공정'이라는 미명하게 '시험'의 형식만 바꾸는 단편적인 해법은 안 된다는 거다. 불평등은, 불평등 그 자체로 문제다.
- 공정하다는 착각, 조국 사태



정치에 관심이 없다.

누가 되도 똑같다는 인식이 머리에 박혀 있다.

그래서 조국 사태를 정당 간의 정치 싸움쯤으로 바라봤다.

불평등? 그게 왜? 조국 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병역비리, 입시비리 등등등 이거 정치인들의 단골 메뉴이지 않나?

왜 조국만이 유별스러웠던 건가?

난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

문제가 없다가 아니라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데...

 

 


 

 

세상이 나를 보고 '사회가 그깟 글 몇 자로 바뀐다고 생각했어?'라면서 비웃는 것 같았다. 그만큼 사회구조적인 모순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기 위해, 관습적인 나쁜 문화를 뿌리째 뽑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특단의 조치를 고민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의 나쁜 면이 반복되는 것을 자꾸 접하다 보면 머릿속에 어떤 유혹이 생긴다. 안타까운 건 알겠는데, 내가 여기에 깊이 빠져 있을 필요는 없겠지? 분노가 치밀긴 하지만, 내가 화낸다고 뭐가 달라질까? 많은 이들의 관심이 필요한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내 일상이 방해받아선 안 되겠지? 등등의 회피 전략이 정교하게 전개된다. (...) 비일상적인 불행이 익숙해져도, 익숙해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꼴이다. 이와 비례하여 사회구조라는 거대한 덩어리는 원래의 속성이 더 강화되고 더 무시무시해지며, 그 위압감에 평범한 개인들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철학만으로 살아가게 된다.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람이 만든 거고 그걸 바꾸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주하기 싫어도 마주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일단 화들짝 놀라고, 아직도 이런 일이 있냐고 탄식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모색하는 고민의 연속만이 사회를 움직인다.

쓰기 자체의 고충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쓰기의 의미'가 나를 괴롭힌다. 비판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글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하는 번뇌가 매번 나를 주저앉게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씩씩해지라는 독자들의 격려를 받았다.

지금 여기의 모습은, 우리의 결과다.
다시 우리가 원인이 되어야, 사회는 변한다
- 에필로그. 지금 여기는, 우리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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