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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소설

[책리뷰] 보건교사 안은영 - 정세랑

by Seuni's Book Journey 2024. 4. 13.




이 학교에는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 출근 첫날부터 느낄 수 있었다. 안은영은 유감스럽게도 평범한 보건교사가 아니었다. 은영의 핸드백 속에는 항상 비비탄 총과,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때기형 장난감 칼이 들어 있다. 어째서 멀쩡한 30대 여성이 이런 걸 매일 가지고 다녀야 하나 속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은 멀쩡하지 않아서겠지. 안은영, 친구들에게는 늘 ‘아는 형’이라고 놀림받는 소탈한 성격의 사립 M고 보견교사, 그녀에겐 이른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언제부터였냐면, 원래부터라고 할까. 은영은 아주 일찍 자신의 세계가 다른 사람의 세계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명료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열 살 무렵이었다. 엄마가 시세보다 훨씬 싼값에 산 집을 리모델링한다고 좋아라 부엌 벽을 깨부수려 할때, 힘껏 만류한 적이 있다. 이 구조 이대로가 좋으니 벽지나 바르자고, 괜히 번거롭게 여기저기 헐고 리모델링을 하면 아빠 집에 가서 살겠다고 협박을 했다. 벽 속에는 얼굴은 좀 상했지만 친절한 아줌마가 있었다. 엄마가 알아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열 살의 은영이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말아 먹을 때면, 벽 속의 아줌마는 조용히 웃으며 내려다보곤 했다. 그 눈길에 적의가 없었으므로 괜찮았다. 적의와 적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감각은 은영 같은 사람에게 일찍 발달할 수밖에 없다.
- 13p

 

사립 M고 보건교사 안은영. 그녀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일찍이 자신의 세계가 다른 사람의 세계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죽은 사람을 보는 능력. 은영은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색 젤리같은 응집체들이 보인다. 장난감 칼과 총에 은영의 기운을 더하면 젤리 덩어리와 싸울 수 있다. 안은영의 삶은 토테미즘적이다.


한문선생님 홍인표. 재단 이사장의 손자. 어렸을 적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전다.

“학교를 계속 유지해라. 그 땅에는 학교 말고 다른 걸 세우면 안 된다. 건물도 다시 짓지 마라. 인표를 선생 시켜. 꼭 선생 해야 해.”
- 19p

 

안은영은 아까의 한문 선생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에너지 장막에 감탄하고 있었다. 보건실에만 박혀 있다 보니, 가까운 데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 선생님을 매우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서도 강력한 의지를 남긴 게 틀림없었다. 그런 보호를 받고 있는데 왜 다리를 다쳤지? 희한한 일이다. 친해지기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만약 사태가 심각해지면 도움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걸어 다니는 행운의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탐났다.
- 21p


희안하게 지어진 건물, 지하층 입구를 동여배고 있는 굵은 쇠사슬. 지하실에 뭔가 있다고 생각한 안은영은 지하실에서 젤리들과 싸우고 있다가 홍인표에게 들키고 만다. 찾을 게 있다고 해서 둘이 함께 찾으러 지하로 내려갔다가 압지석이라고 새겨져 있는 돌을 발견했고 홍인표가 그 돌을 뒤집었는데…















땅이 흔들리고 운동장 일부가 아래로 푹 꺼졌다. 그리고 그 흙더미를 헤집고 머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안은영은 자신의 장난감 총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홍인표가 안은영을 찾아 옥상에 올라왔고, 안은영은 홍인표의 손을 잡고 인표의 에너지 기운을 더해서 알 수 없는 생물체를 물리쳤다.

안은영은 그 후에도 수도 없는 기행을 계속했고, 큰 놈을 잡아야 할 때면 인표의 손을 빌려야 했다.


<가로등 아래 김강선>

- 크레인 사고였어. 넘어오는데 그대로 깔려 버렸어. 멍청한 말이지만, 나는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언제나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피하기는 무슨.
말끄름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강선이 말해 주었다. 은영은 문득 크레인 사고 뉴스를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되짚어 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크고 무거운 기계가 중심을 잃고 부러지고 휘어지고 떨어뜨리고 덮치는 일이 흔하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 값없게 느껴졌다.
- 189p

 

중학교 동창이었던 김강선이 그림자가 없는 상태로 안은영을 만나러 왔다.
16년, 17년 만에.
친하다기 보다는 학교에서 왕따인 두 사람은 자연스레 계속 짝이 되었다.
만화를 잘 그렸던 친구.
예전에 어울렸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지만 죽은 후의 만남이라 안타깝다.
그래도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에 외롭지 않게 말동무를 해줄 수 있는 것은,
불행일까 행일까?
도깨비의 은탁이가 생각난다.








 









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읽으며 쾌감을 느끼지 못하셨다면 그것은 저의 실패일 것입니다.
- 작가의 말

 

정말 즐겁게 웃으며, 상상하며,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다음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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