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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소설

우리가 기대하는 멸망들 - 서강범

by Seuni's Book Journey 2024. 3. 23.

 

 

 

목차

반문명 선언서
감독님, 이 영화 이렇게 찍으면 안 됩니다
디어 브리타
배부른 소리
캠프 버디의 목을 조르고
비행운 아래에서

작가의 말

 

 



<감독님, 이 영화 이렇게 찍으면 안 됩니다>


명휘가 출근 길에 못 보던 차가 주차되어 있는, 먼지로 뒤덮여 있는 차에 호기심이 생겨 차 안을 들여다본다.
차 안은 널찍한 광장이었다. 넓이가 고급 호텔의 로비 정도.
거대한 생물의 내장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흥미로운 피사체를 찍으려고 전원을 켜고 뷰파인더로 들여다보면 온통 검은색이다.
우연히 마주친 직속상사 최팀장이 명휘를 재촉해서 출근을 한다.
퇴근 후, 자료원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고가의 촬영 렌즈를 카메라에 달아 차 안을 찍어도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머릿속에 기억을 해두려고 해도 시선만 돌리면 기억이 희미해졌다. 노트를 꺼내 적어보려 해도 ‘이상한 차를 보았다’ 외에 다른 구체적인 묘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명휘는 밤새 창을 봤다. 출근 시간이 될 때까지도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지상인의 후손들은 지구에서 살기 어려워지자, 깊숙한 지하로 들어가 삶의 기반을 세웠다. 지각 아래 상부 맨틀 안에서 살아남은 인류는 느리지만 지속 가능한 번영을 다시 꿈꾸고 있었다.
지하인 사회에서 시간 여행 기술의 발명 이후로 기록과 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시간 여행은 ‘기록자’라는 지위가 부여된 자에 의해서 과거 여행을 했다.
시간 여행의 용도는 과거로 사람을 보내 과거 지상 인류의 역사, 상태나 자연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으로 다큐멘터리 부처가 시간 탐사선을 운용할 권리를 가진 유일한 조직이다. 기록자와 과거 인류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된다.

연출자 젠은 기록자 뮬. 두 기록자가 온 이 과거 시대는 지상 생태계 파괴의 변곡점이 되는 때이다. 21세기 초 지상인들이 대체 어떠했길래 환경 파괴가 가속화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얻기 위해 시간 여행을 왔다.
젠은 뮬을 시간 탐사선 안에 남겨두고 혼자 취재를 떠났다. 뮬은 젠을 찾으러 갔다. 뮬은 젠이 연결을 끊었다는 것을 알고, 더이상 참지 못하고 시간 탐사선으로 돌아왔다. 탐사선 근처로 돌아온 뮬은 한 지상인이 탐사선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탐사선은 낡은 자동차 모양으로 위장했다. 탐사선이 내뿜는 파장은 근처 지상인의 무의식에 간섭해 탐사선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게끔 했기에 지상인이 알아채기는 어렵다. 근데 왜? 어떻게?

 

 

 

 

 

 

 

 

 

 

기록을 막는 파장이 작동되기에 기록매체에 저장은 어렵겠지만, 뮬은 크게 당황했다.
그 때 젠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지상인들 중 특수한 개체가 없다고 판단하여 돌아오겠다고 한다.
만약 젠이 저 지상인 개체를 발견한다면? 젠이 오기 전에 저 지상인을 내쫓으려 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뮬과 피비(탐사선에 탑재되어 있는 인공지능)는 지상인의 존재를 지우고자, 명휘의 삶의 궤적을 파악하고는, 미래에 영향도가 없음을 파악하고, 백업 데이터도 남기지 않게 설정하여 명휘에게 원자 분해기를 가동해 명휘는 대기중으로 사라졌다.

젠이 돌아온 후, 젠이 찍어온 영상들을 보며, 멸망 직전의 문명의 어리썩은 풍경을 담은 꽤 나쁘지 않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둘은 서로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구성을 짰다.

젠은 작가로서 은퇴작으로 걸작이자 문제작을 내놓기를 원하기에 다른 걸 원했다. 해명되지 않은, 특수하고 이례적인 데이터. 뮬 몰래 피비와 내통해 백업된 현실 데이터 중 조금이라도 수치가 이상한 것들을 몽땅 뒤졌다. 피비는 명휘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누락하고 정보를 넘겼다. 젠이 데이터를 분석 중 시간대가 아예 빈 곳을 보았다. 이건 오류이거나 누락이다. 젠은 뮬을 찾아가서 추궁했고, 둘은 언쟁을 했다. 그때 누군가 근처 좌표로 시간 여행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다큐멘터리 부처 소속 시간대 관리 부서의 감사원 벡이다. 젠과 뮬 때문에 변한 미래에서 온 감사원이다. 명휘의 죽음으로 젠과 뮬이 온 미래가 사라질 위기여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온 것이다.

백업 데이터도 남기지 않고 삭제한 명휘를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미래는 안전할까?

 

 

 

 

 

 

 

 

 

 

명휘를 살릴 방법을 연구하다가 물질 조작기를 통해 벡이 명휘가 되기로 한다. 지금보다 20년 전의 명휘의 3살 때의 시절로 돌아가서 명휘의 인생을 살기로 결정한다. 물질 조작기를 통해 합성된 결과물이 나오는 체임버에서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지상인 유기체를 20년 전 과거로 돌아가, 그가 자란 고아원 앞에 아이를 내버려뒀다.

유아 상태의 명휘로 변화한 벡이 그 시간대에 안착한 이후로 뮬과 젠의 세계는 붕괴를 면했다. 뮬과 젠은 명휘의 삶을 관찰하는 작품을 찍기로 한다. 명휘의 삶을 기록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명휘, 아니 벡은 보편과 일반에서 벗어난 인간이었다. 완전한 지하인도 지상인도 아닌 경계의 인간. 명휘는 미지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살다가 무한히 죽을 것이다. 지상의 먼 세계를 지키는 줄도 모르고.
- 56p



특별하지 않더라도,

묵묵히 나의 길을 가다보면,

내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는,

미래가 있지 않을까.

 

 



<배부른 소리>


“바로 일 시작할 수 있죠?”
인사과장을 따라간 곳은 텔레마케팅 업무를 하는 곳. 기백 명의 텔레마케터들이 바지 안에 기저귀를 찬 채 쉴새없이 영양제의 놀라운 효능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얼마전 애인과 이별한 언니는 평생 마른 몸을 갈망했고, 이너프라는 약으로 꿈을 이뤘다. 이너프를 복용하면 정말로 살이 빠졌다. 하지만 몸의 통제력을 잃어서 언니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누워서 멍하는 스크린을 보는 게 전부였다.
점심 직장인 손님이 대부분인 백반집을 운영하는 아빠는 손님이 줄어 가게를 닫고, 전국의 창업박람회를 다닌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나는 극단 생활을 하고 있었고,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언니와 아빠를 보는 것이 힘들어 연극에 더 집중했다. 언니가 이너프 남용의 부작용으로 배변을 조절할 수 없어졌고, 약을 숨기면 자해했고, 음식은 사흘에 한 번 씩 묽은 죽 반 그릇 정도만 먹었기에, 나는 극단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언니 일에 더이상 방도가 없다고 생각이 들 때쯤, 극단 선배에게 베이클의 자회사라는 소문이 있는 한 회사에서 이너프 남용자들을 대상으로 식사 대용이 가능한 고용량 식이 영양제를 통신 판매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영양제는 이너프 만크이나 손에 넣기 힘들어 공격적으로 판매 영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자사 직원들에게는 영양제 우선 구매권을 보장하고 있는데, 이것에 내가 이곳에서 일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텔레마케터의 고충 중에 냄새는 없었다.

“자기는 이너프 안 먹나 봐?”
과장은 냄새 때문에 놀란 나를 보고 더 놀란 눈치였다. 기자귀를 차고 앉아 있는 직원들 대부분이 이너프의 장기 복용자였다. 그들은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이너프를 한 알씩 먹었던 것이다.
“강요는 아닌데, 일하다 보면 필요해질 거야.”
과장은 옆자리 직원 제니퍼에게 나를 인계했다. 제니퍼에게 영양제를 언제 구할 수 있는지 묻자, 수습 기간 세 달 이후나 가능하지만, 제니퍼가 구해주겠다고 했다.

근무가 끝나고 제니퍼와 저녁을 먹으면서 영양제를 구할 방법에 대해 얘기를 했다. 제니퍼의 말이 영양제는 사실 일반 비타민제로 효과가 없지만 간단한 시술이면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손상된 뇌 시상하부를 건강한 걸로 교체하면 된다는 것이다. 언니와 나는 혈액형이 같기에 이식 자체는 가능하다. 내가 손상된 시상하부를 이식받아 평생 불감증 걸린 좀비로 살아야 한다.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언니의 상태가 안 좋았기에 제니퍼의 제안에 승낙했다. 당장 오늘 수술을 했다.
수술 후, 언니는 사라졌던 허기가 돌아와 환자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언니는 다시는 이너프를 복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나는 모든 생의 감각이 둔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수술의 대가로 제니퍼에게 상납하는 통화 할당량과 기존에 부여받은 통화 할당량을 소화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다. 하지만 영양실조로 쓰러지면 해고될 게 분명하기에 결국 언니가 먹던 이너프를 복용할 수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변 신호를 느끼지 못해 위험한 상황들이 반복되었다. 결국 출근할 때 기저귀를 차게 되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언니가 떠났다. 우린 서로의 불행의 채무자이자 채권자였다. 언니가 떠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언니가 떠나지 않은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그 세상에서 언니는 나에게 평생을 빚지고 묶인 채로 나에게 삶을 헌신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선택지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살아갈 삶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나는 내 주변의 대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비로소 당위의 삶은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이제야 탕감되었다.
- 1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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