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서랍에서 꺼낸 책,
이 책이 뭐지 싶으면서 앞쪽을 보니
"결혼기념일 9주년을 맞이하며.."
남편의 글씨가 써있다.
잠긴 서랍에 몇 년동안 있다가 이제서야 나온 책.
앞부분을 읽으니 기억이 난다.
재미난 추억이 깃든 책.
P19. 사람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웅덩이이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 물속에서 수면 위로 떨어지는 낙엽을 올려다보는 것, 그리고 함께 휘청해보는 것이라고.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다면 고요히 그 존재를 다치지 않게 안아볼 수 있었을까. 그럼 사랑을 주는 기분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사랑은 알게 되는 것뿐. 사랑은 예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P34. 엄마.
세상에서 가장 짧게 부를 수 있는 슬픔.
P70. 나를 둘러싼 관계들을 끊어야 하는 날 그리고
엄마와의 관계가 끊어질 때가 온다는 사실
그래, 사람의 모든 관계에는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끝나고 마는 유통 기한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P70. 문어를 먹던 날, 우습고 부드럽게 씹히던 그 날은 너무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날들 중에 하나였다. 우리를 위해서만 머물고 가는 장면들이 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다는 것이 퍽 슬펐다.
P103. 누군가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행복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얼마나 많은 행복과 행운을 꿈꿨는지 왜 신은 내게 행복을 한 번에 주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나의 고요 속에서 소용돌이치곤 했다. 맹꽁이들은 알려준다. 이미 와버린 행운들을 나 모르게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고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한밤중의 검은 빛들은 천천히 움직인다. 잠들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서 느리게 흘러간다.
P109. 죽어가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로드킬을 당한 고양이에서 시작되었다. 내 나이 열 살에 죽음이 온전히 적막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본 적 있다. 작고 단단한 세계가 몰락했고, 사방의 어둠 속에서 출렁거리는 서늘한 겨울의 눈빛이 나의 두 눈을 멀게 했다. 슬픔이라는 것은 내 눈과 귀가 먹먹해지는 것이구나, 나는 죽음 앞에서 흘러가는 검은 고요일 뿐이구나, 죽음은 오로지 신만이 관장할 수 있다는데, 그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축 늘어진 그림자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듯 검은 물이 계속 나왔다. 하염없이 흐르는 울음처럼.
P141. 나는 아버지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끝나도 사랑으로 시작될 수 없구나. 죽음으로도 용서가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P172. "그러니까 인간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한동안 네가 전부를 걸었던 것에게 언제고 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끝없이 버려질 테지만, 그 자리로 돌아와 다시 사랑하고 만다는 걸. 신이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히는 거야."
P193.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정작 사랑에 대해서 모르다가
그 사람을 잃고서야 사랑을 제대로 알게 되는 거라고,
그제야 그 속을 열어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라고.
그는 생각에 잠겼다.
행복한 순간들은
돌아보지 않는 기차의 뒷모습처럼.
늘.
P209. 슬픔은 가끔 너의 편이기도 해. 너의 슬픔 안에서 네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까지 언제든 기다려줄게. 네가 뭘 해야 도움이 되는지 엄마가 알면, 별도 따다 줄 수 있어.
슬픈 맹세
한 남자가 눈길에서 쓰러진 천사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는 나와 얼마나 살 수 있냐고 물었고
천사는 자신이 먼저 떠나기 전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느새 천사는 등이 굽고,
잘 들리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남자는 금방 늙어가는 천사의 시간이 대수롭지 않았다.
남자는 결혼을 했고 더는 천사가 필요 없어졌다.
그는 쓸모가 없어진 천사에게 날개 끝에서 빛나는 귀를 달라고 했다.
천사는 그에게 귀를 건네주었고
그는 천사를 산속 눈 밭에 버리고 왔다.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걱정은 하지 마"
천사는 떠났고 그는 생각했다.
신은 왜 모든 인간이 천사를 엄마라고 부르도록 만든 걸까.
왜 엄마가 죽어서야 뒤늦게 알게 될까.
그는 모든 인간이 하고 마는 이상하고 슬픈 맹세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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