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우리 셋은 서로에게 거짓말을 했고 처음으로 가까워졌다
그건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
하나에서 셋으로, 혼자만의 방을 나와
셋으로 이루어진 슬픔의 너른 품안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채운. 축구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그만둔 후 전학을 갔다. 엄마는 감옥에 있고 이모 집에 얹혀 살고 있다.
지우. 용식이라는 도마뱀을 키우면서 용식이의 크는 과정을 그린 <용식일기>를 카페에 올린다. 지난 달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으로 혼란스럽다.
소리. 손을 잡으면 누군가의 죽음을 예감하는 능력이 있다. 그 뒤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다 보니 결벽증, 강박증이 있다는 오해를 받는다.
소리는 엄마의 암 진단을 받은 걸 안 이후로 매일 엄마 손을 잡고 확인을 했다. 하지만 엄마는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시게 된다. 분명 그 날도 엄마의 앞날을 확인했는데도 말이다.
채운은 아버지가 만취해 폭력을 휘두르던 어느 날 아버지를 칼로 찔렀고 어머니가 그 죄를 덮어버리고 감옥에 가게 된다. 아버지는 요양시설에 가지만 하루하루 좋아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두려워한다.
지우는 엄마가 뇌암 판정을 받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동해 여행 중에 밤에 혼자 절벽에서 떨어져 돌아가셨지만, 일부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지우에게는 엄마의 애인인 선호아저씨를 떠나, 돈을 벌기 위해 용식을 잠깐 소리에게 맡기고 멀리 노가다 일을 하러 간다.
소리는 우연히 채운이 키우는 개 뭉치를 발견하고는 뭉치의 손을 잡으면서 죽음을 예감한다. 채운에게 뭉치가 곧 죽을거라는 암시를 줬고, 채운은 소리의 능력을 믿고는 자기 아버지를 만나달라고 부탁한다.
어느날 우연히 알게 된 인터넷 카페에서 본 <내가 본 것> 만화 1,2화를 지우가 그린 것이라고 확신한 채운은 같은 연립에 살았던 지우가 그 날 밤의 사건을 목격한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세 아이의 서로 얽혀 있는 이야기들.
채운의 사고를 목격한 지우는 그 날, 피 묻은 엄마에게 안겨서 속삭이듯 비밀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채운을 부러워한다.
채운의 엄마는 채운에게,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고, 아빠를 떠날 생각이었고, 엄마가 감옥에 있는 이유가 채운이 아닌 엄마의 선택으로 왔음을 편지를 통해 고백한다.
엄마의 죽음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소리는, 어느 날 엄마의 무덤가에서, 엄마가 병상 중일 때 한 두 번, 엄마가 죽기를 바랐음을 고백한다. 그 날, 아빠에게서 들은, 병상 중에 엄마가 딱 한 번, 조력사를 원한 적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엄마가 자신을 두고 떠난거라 생각하는 지우는 선호아저씨와 재회한 후, 선호아저씨의 비밀과 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엄마의 사망 원인이 실족사였음을, 그 밤에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흘 밤낚시꾼들이 들었음을 알게 된다.
각자가 말 못할 비밀들을 품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이 주인공들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작가님의 말대로 이들이 앞날을 잘 헤쳐나가길 나도 바라본다.
나 또한 시작된 나의 이야기를, 잘 이끌어서 마침내는 끝나는 이야기를 잘 이끌어보고자 한다.
P10.
- 그럼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스스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 뒤로 지우는 상상 속 흐린 형상의 어른에게 물었다.
- 어떤?
-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요. 끝내 살아남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요.
상상 속 어른은 잠시 침묵하다 '그런 일이 생길 순 있어도 그런 이야기가 남기는 어렵다'고 했다. '뭔가 겪은 사람만 있고 그걸 전할 사람이 없다면, 다른 이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겠느냐'면서. 그러곤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 그러니 적어도 한 사람은 남겨두어야 해, 한 사람은.
그 말에 지우는 왠지 반발심이 들어, '생존'에 비위가 상해 뭐라 대꾸하려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다시 귀기울였다.
P65.
- 그런데 왜 만화야?
- 어?
- 조각도 있고 뭐 디자인이랑 다른 것도 많은데, 왜 만화인가 해서.
- 돈이 덜 들어서?
- 그리고?
- 그냥...... 이야기가 좋아서?
-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 끝이 있어서?
- 난 반댄데.
- 뭐가?
-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 그런가?
- 응.
P132. 중요한 건 여러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지우가 용식을 깊이 봐온 것만큼 용식 또한 지우를 계속 지켜봤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 거였다.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 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그림으로. 그렇게 그저 시점이 바뀐 것만으로 지우가 무언가 알아챘음 싶었다. 비록 그게 지우가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알려주는 거라 해도. 그런 앎은 여러 번 반복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P134.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언제인가?' 소리가 슬픈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
그런데 채운은 지금 무서운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라고, 거기서 잘 빠져나오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곧 채운과 만날 예정이었고, 그건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
P182.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P215. 그러다 공사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얼마나 악착같이, 얼마나 건강하게 살아가는지 보며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시골의 두 딸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는 김씨 아저씨를 비롯해 부모님의 병원비를 대려 이곳에 왔다가 몸을 다친 진구 형처럼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 살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지우는 '다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결국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임을 깨달았다.
P216. 정류소 너머로 어둠 속 대형 아파트 단지 건설 현장의 실루엣이 보였다. 허공으로 불쑥 솟은 여러 개의 골리앗 크레인이 오늘따라 더 웅장하고 황량해 보였다. 지우는 현장에서 일하며 자신도 그런 수많은 기계 부품 중 하나라고 느꼈다. 수많은 인부들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안전모를 쓰고 있어 더 그랬다. 그럼에도 그 압도적인 허무를 견딜 수 있었던 건 모두 용식 덕분이었다. '내게는 책임져야 할 존재가 있다'는,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지우를 버티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사라져 지우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저 온몸이 떨리고 숨이 가빠오면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P221.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P233.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 이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
P238. 이 소설을 쓰며 여러 번 헤맸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있지만, 작가로서 이 인물들이 남은 삶을 모두 잘 헤쳐나가길 바라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삶은 비정하고 예측 못할 일투성이이나 그럼에도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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