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는 둘이나 뿌리는 하나로 얽힌 두 나무가 있었다. 한때 그들은 어린 나무들이 우르러볼 만큼 장엄했다. 이제 홀로 남은 숲속의 작은 나무. 수천 년을 살아낸 그 뿌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다. 나무가 둘일 때는 더 자라야 할 이유가 있었다. 자라는 만큼 가까워졌고 둘은 하나가 되고 싶었다. 홀로 남은 나무는 자라지 않았다. 성장을 응축했다. 그는 다시 죽을 수 없다. 베어 내면 그는 움틀 것이다. 어떤 비바람과 불길도 그 뿌리까지 삼킬 수 없다. 지독한 가뭄도 그 중심까지 침투할 수 없다. 숲의 모든 존재가 그 죽음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되살아난 그는 되살리는 존재,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에게 파괴된 적이 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을 파괴한 적이 있다.
-21p
그러나 악몽은 계속되었다. 미수는 악몽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꿈이 아니라고 굴복해버리면 평생 그 일을 떠맡을 수밖에 없음을 작감했으니까.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 그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
-72p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좋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날까. 환상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103p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정직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104p
신문과 뉴스는 전하지 않는 소식들. 노후 장비나 안전 장비 부실이 아닌 개인의 부주의로 수렴되는 사고들. 가족에게조차 경황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은폐한 죽음들. 중개가 아니였다면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목화는 지켜봤고 매번 단 한 사람을 살렸으나 살렸다는 느낌은 마주 희박했다. 목화는 엄마의 증오를 이해했다. 그 증오를 자기 몸에 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08p
무슨 일을 하게 되든 힘들거야.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기도 어렵겠지. 그러나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어. 남들은 하지 않는 일을 네가 하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누가 알겠니. 내가 하지 않는 일을 또 누군가가 하고 있을지.
-112p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 목화는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125p
목화는 지긋지긋하다고 중일거렸다. 늘 죽음을 생각하는 삶. 추상적 죽음이 아닌 구체적 죽음의 장면에 매몰된 삶. 엄마는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진 마"라고 조언했지만 어떻게 다르지 않단 말인가. 엄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남들도 이렇게 산다고. 매 순간 죽음을 기억하면서.
- 128p
목화는 종종 상상했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가 홀로 죽은 사람을. 작은 행성의 드넓은 바다에서 홀로 탄생해 홀로 숨 쉬다 홀로 소멸한 생명을. 끝없는 사막에서 홀로 피어나 홀로 메말라 가는 식물을. 그들이 확실히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신은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우주에서 생명이란 너무나도 이상한 현상. 신은 생명에 관심이 없다. 살려달라는 기도를 신은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 생존의 각종 증거와 인사말을 저장한 탐사선이 우주를 비행하더라도 그것은 돌과 불덩이와 먼지와 암혹 물질 사이를 떠돌 뿐. 적막과 적요뿐. 어둠과 고독뿐. 인류는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작은 행성에서 홀로 존재하다 홀로 사라질 것이다. 인류가 잠시나마 실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줄 이는 없다.
-142p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155p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하고 호모사피엔스가 유일한 인류로 살아남은 시기는 대략 3만년 전. 인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생존할까? 오직 나무만이 지구의 역사를 안다. 마지막까지 증명할 것이다. 하나의 뿌리로 부활하고 환생하며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그들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
-161p
임천자는 그 밤 내내 생각했다. 젊은 시절 자기가 살리던 단 한 명들처럼 자기 또한 누군가의 단 한 명이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그렇게 살아났기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맡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날이 밝았고, 임천자는 무사히 산에서 내려왔다. 다음 날부터 임천자는 매일 새벽 맑은 물을 떠 놓고 깨끗한 정신으로 기도했다. 자기가 살아나던 순간 죽었을 존재들을 위해서.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자기가 깨달은 것을 장미수에게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장미수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렸다. 깨닫지 못한다면 그 또한 장미수의 운명이라 믿으면서. 그러나 장미수에게는 '왜 나인가'에 대한 답이 이미 있었다. '임천자의 자식이니까' 이상의 답은 필요 없었다. 신목화에게 '왜 나인가'란 질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이미 주어진 운명이다. 신목화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내 운명에 내 몫이 있음을, 내 의지가 개입할 수 있음을, 내 삶의 주인은 나임을 증명하는 것.
-163~164p
이전까지는 오직 사람을 살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살아난 자가 얼마나 더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무가 주는 생명에 시한이 있는가? 목화는 그 답을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165p
아무리 들어도 직접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잖아.
-178p
목화는 미수가 갖지 않은 의문을 가졌고 답을 구하려고 애썼다. 주어지는 일을 꾸역꾸역 해내는 것에서 나아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이 일을 왜 계속해야 하는가에 자기만의 이유를 확보하려는 시도. 미수가 증오하거나 경멸하면서 버텼던 시간을 목화는 다른 방법으로 통과하고 있었다. 그저 나이 들어 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일까? 미수는 궁금했다. 목화가 어디가지 나아가고 무엇을 취할지. 그것을 위해서라면 불법이든 범죄든 남에게 비난받을 짓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마침내 목화가 자유를 얻는다면 미수는 모두 용서하고 받아들을 작정이었다. 자기 운명을 비롯해서 금화의 운명까지.
-200p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죽음.
그 죽음을 지켜보는 누군가. 어떤 마음으로 보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그 고통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사람을 살린 걸까? 죽인 걸까?
엄마나 할머니와 달리
목화는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한다.
사람을 구한다는 것에 꼭 목숨을 구한다는 의미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는 거야. 살아도 귀신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죽어서도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 내 동생이 하는 일이 뭐겠어. 신령에게 열심히 기도해서 산 사람을 살리는 일이거든. 근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말이지 않아?
목화는 꼴 사장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산 사람을 살리는 일.
끌 사장의 그 말은 목화의 몸을 나갈 길로 조금 돌려주었다.
-204р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는 힘'이 사람의 세상에서는 중요하겠지만, 그 세상을 만들고 품은 우주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207p
"이 사람 뭐야?"
읽으면서 연신 내뱉은 말.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읽으면서 감탄하고 감동했다.
읽을 책 양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적이 얼마만인지...
목화는 오늘 단 한 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삶 가까운 곳에 아주 잠깐 머물렀다. 그것은 여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위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을 살릴 때는 그런 기분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죽음에 파묻혀 있었기에, 너무 지쳤기에 사람을 살리고도 불행했다. 그런데 오늘 누군가의 연장된 삶이, 지속된 하루가, 누구세요?하는 일상적인 물음이 목화의 마음에 깃들었다. (…) 기뻐하는 사람보다는 슬퍼하는 사람 편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삶과 죽음을 전혀 다른 세계라고 인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무엇은 무엇보다 나은 것, 가치 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무언가를 긍정하면 다른 것은 부정되었다.
-213~ 214p
뒤섞인 존재가, 사이가, 현상이, 모호한 상태가 훨씬 많다. 실종된 금화는 목화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이분법으로 나누면 편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고. 금화가 그런 존재였다. 목화와 목수도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금화는 말했다. 너를 돕지는 못하지만 지켜주겠다고. 그 말을 수백 번 곱씹으며 목화는 희망과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미로에 이정표를 세우고 싶었다. 금화 언니는 진실을 말했다. 여기 없는 사람이 나를 도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켜줄 수 있다. 그 믿음은 내 안에 있다.
-215p
죽지 않는 신에게 목숨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무한한 목숨을 특정인에게만 나눠 주는 것이 어떻게 사랑의 증거가 된단 말인가.
-219p
살아난 사람이 어떻게 살든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은 목화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거기 존재했기에 목화의 나갈 길은 조금씩 이어졌다. 지름길은 아니었다. 확인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삶도 있었다. 그럴 때 길은 굽었다. 가로막혔다. 미로처럼 맴돌았다. 그렇더라도 어쨌든 나아가는 길이었다. 목화는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명을 살리는 일을 거부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는 목화 또한 죽음이 덜 억울할 사람,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죽어야 할 사람,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목화는 타인의 삶과 죽음에 판단을 멈추었다. 그리고 중개 중에 이전에는 하지 않는 것을 했다.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이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 그것는 나무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이었다. 나무의 지시가 아니었다. 목화의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220~221p
삶과 죽음에 대해.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을 많이 해본다.
여태 궁금해 본 적 없는 질문들.
왜 여태까지 궁금하지 않았을까 싶은 질문들.
나의 생각을 터주는 책.
할머니는 고통이나 증오를 내비친 적이 없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적도 없다. 순교자처럼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했다. 어떤 가르침이나 당부도 없이, 당신의 일에 대해, 자식에게 이어진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할머니의 마음을, 말할 수 없음을...... 목화는 이해할 것만 같았다.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말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임천자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목화에게 전했다.
스스로 구하라고.
-229p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233p
금화의 행방에 대해서 궁금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죽음은 많다.
목화는 자신의 일이 그런 죽음을 숱하게 보는 것임에도
금화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
살아있어야만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어떻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주어진다.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원하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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