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이렇게나 불의하고 부실하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그런 세상에서 나는 '아직' 안전하고 안온합니다. 아이에게 영양가 높은 반찬을 먹이고, 하루에 세명이 일하다가 죽는 헬조선에서 아이가 더 나은 지위를 차지하길 바라며 학업을 뒷바라지하고, 가끔이지만 휴가도 가죠. 빤한 일상이지만 그조차 한순간에 빼앗긴 이웃의 생생한 고통을 듣고 나면, 삶의 허리를 베고 들어온 죽음의 실체를 목도하고 나면, 문득 나 사는 일이 어색해집니다.
- 164~165p
"잘하셨어요. 일상을 나누지 못하면 친구 하기 어렵잖아요."
- 166p
괜찮아 보이는 것과 괜찮은 것은 생과 사만큼 다른 일인 것 같습니다.
- 167p
유가족의 달력은 눈물이 마를 새가 없네요. 생일이 지나면 생일만큼 힘든 기일이 오고 기일이 지나면 괴로운 명절이 오고... 내 이웃이 슬픔의 둑이 터지고 무너져내리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일상을 나누는 일상을 고민합니다.
- 168p
지나친 배려는 때론 배제가 되죠.
- 170p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면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 대산은 결코 슬픔의 감상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 눈뜨기 쉽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그었습니다. 슬픔은 위험한 감정입니다. 가족의 뺏긴 유가족들, 일자리를 뺏긴 노동자들, 온갖 사회적 참사 피해자의 글을 통해 세상을 공부한 저도 슬픔이 얼마나 급진적인 감정인지 목격했습니다. 사람이 소중한 것을 잃고 나면 세상이 보이는 사람이 되죠. 슬픔의 렌즈로만 보이는 은폐된 진실을 보았기에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거듭나죠.
- 176p
왜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
"나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 179p
환자는 병을 앓는 일이 죄를 짓는 일인듯, 사람들 앞에 서면 어느 사이에 마음이 을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자신의 당당함을 지켜야 한다.
- 182p
너는 훗날 아이를 낳고 10년 넘게 엄마로 살아낸 지금에야 '떠난 엄마'를 바로 본다며 이렇게 글을 맺었다.
"그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엄마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다. (...) 엄마는 나에게 역할이 아닌 주체로 살라고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20대 후반의 엄마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엄마,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 192~193p
너도 44년 만에 엄마를 재의미화했다.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갔을까'에서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로 질문이 나아가기까지 네 온 생애를 바쳤다. 네가 그토록 책을 떠나지 못하고 읽고 쓰고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있지만 네가 모르는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구나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이해는 그만큼 고도의 지적 작업이다.
- 194p
한 사람이 외벽 작업을 하는 반나절만이라도 땅 위에다 넓고 두툼한 매트리스 같은 안전장치를 깔아놓으면 제발 좋겠습니다. 주민들이 그를 운수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도구적 인간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살아야 하는 존엄한 사람으로, 동료 시민으로 보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벽에 붙은 벌레 털어내듯 사람을 떨궈내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는 안전장치를 하는 것보다 목숨값이 쌉니다."
- 204p
그때 너 시인 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이를 도로 삼켰다. 시인 같다는 건 시인이 아니라는 전제를 둔 말이니까. 시인과 시인 같은 사람의 경계를 아이에게 주입하고 싶지 않다. 인간과 고양이의 구분을 두지 않고 '결혼'하겠다는 아이니까.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쓴 사람이 시인이다. 살면서 우리는 죄인지도 모르고 죄를 짓듯 시인지도 모르고 시도 짓는다. 잠결의 아이처럼.
- 208~209p
집 곳곳에 책이 있지만 수레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나도 굳이 아이에게 권하지 않는다. 한때는 책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신앙에 얽매이는 엄마였는데, 똑똑한 게 자기답게 사는 데 도움이 되는지 걸림돌이 되는지 언제부턴가 헷갈린다. 그리고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교감하며 느낄 것은 느끼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걸 이젠 안다. 타인들의 삶을 관찰하고,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보며 자연스레 터득했다.
- 210p
두려움은 판단을 흐린다. 잘 모르면 얘기를 듣고 공부하며 알아가는 게 순리지만 이해는 멀고 분노는 가까워서 대개는 자기 불안을 혐오로 방어하는 것 같아.
- 214p
섞여 살면서 배운다. 사랑도, 용기도, 글쓰기도.
- 216p
'미성년'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좋은 어른, 좋은 양육자가 되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자식에 대한 성실한 이해는 귀찮고 빠른 복종을 받아내길 원하는 이들이 '사랑의 매'라는 죽은 문자를 신봉하는 게 아닐까요.
- 232p
일회용 컵 쓰고 버리듯 사람도 쓰고 버리는 비인간적 시스템에 맞서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자책을 멈추고 목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 "나도 인간이에요."라고.
- 243~244p
한 사람의 '능력'이란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자질보다 가족으로부터 우수한 학업 기회가 꾸준하게 제공되느냐, 행운이 따르느냐 등 비능력적 요인에 의해 많은 것이 좌우됩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한 능력'이 현수의 능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게 됩니다. 저자는 말해요. "능력은 환경적·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이다."
- 248p
공정함의 대명사 같은 능력주의가 실상은 차별과 불평등의 근거가 되는 이 부조리한 현실이 너무 완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시험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주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한번의 시험이 지속적인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글쓰기는 생을 사랑하는 첫번째 작업이다."
- 267p
"샘, 생각이 다른데 피곤하게 꼭 같이 배워야 돼요?" 맘 편히 말 통하는 사람끼리 공부하자고요. 그 논리대로 저는 질문했어요. 비슷한 정보량과 익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끼리 왜 굳이 모여서 공부해야 하느냐고요. 그건 독백이지 토론이 아니라고요. 함께 공부를 해도 심기에 거슬리는 게 없고 이전과 달라지는 게 없으면 서로에게 좋은 공부가 아닐 가능성이 있어요. 사유는 마찰에서 싹틉니다.
- 290~291p
만사에 즉각 반응하기보다 한 호흡 고르고 신중할밖에요. 모른다는 것이 배움을 중단하는 계기가 아니라 배움을 이어나갈 동력이 되려면 지혜를 모을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다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중이라서 우리가 모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합니다.
- 291~292p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은 그가 잠재적 피해자의 고통을 알면 사라질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몸을 돌려 타인의 입장으로 건너가보는 일은 지구를 반대로 돌리는 일처럼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게 희망입니다.
- 312~313p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이 죽는 거나 발암물질에 더 많이 노출되는 상황은 차별이 낳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자살률이 높은 것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차별은 일의 위험을 받아들이라는 강요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차별에 적응하면서 위험을 감수하려고 애쓰다가 병들고 다친다."
- 329p
읽거나 쓴다고 해도 현실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은데 이런 작업을 지속시켜주는 동력이 무엇이냐고요. 그럴 때 저는 답합니다. "세상은 안 바뀌는 거 같지만 제가 바뀌었거든요. 저도 세상의 일부이고 적어도 제 몫만큼은 변했잖아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 333p
애들은 몰라도 되는 문제의 가장 큰 피해는 늘 죄 없는 애들에게 돌아갑니다.
- 335p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많이 하는 후회가 뭐냐고 물으면 '공부 좀 할걸'이라고 한다. 한국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회도 드문데 모두들 공부를 안 했다는 후회를 한다. 그리고 과잉 노동과 저임금을 공부 안 한 '내 탓'이라고 받아들이는 정서를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저자는 노동 환경의 많은 문제점은 사회적 의제가 되기보다 '능력 없는' 개인이 당연히 짋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고 분석해요. 맞는 말이죠. 산재 사망 사고가 나면, 나는 혹은 내 아이는 공부해서 저런 위험한 일자리는 피하자는 게 일반적인 산재공화국 시민으로 사는 대처법입니다. 구조의 문제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공부 좀 할걸"도 권력의 언어였습니다.
- 336p
관련 포스팅 더보기
'국내도서 > 시,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리뷰] 나는 왜 산티아고로 도망갔을까 - 이해솔 (89) | 2024.05.21 |
---|---|
[책 리뷰] 파타 - 문가영 (65) | 2024.04.12 |
괜찮은 오늘을 기록하고 싶어서 (84) | 2024.03.27 |
우리가 애정했던 아날로그 라이프 - 강작 (153) | 2024.03.11 |
책의 말들 - 김겨울 (398) | 2024.02.19 |